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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그리스도인을 위한 심미안 기르기
by 서나영2024-03-27

어린 시절부터 악기들을 다루고 듣다 보니 얻은 것은 예민한 귀다. ‘예민’의 다른 말은 섬세한 구분이 빨리 가능한 상태다. 초등학교 때는 3년간 베이스 리코더로 리코더부에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소리만 들어도 아는 텅잉 기술과 섬세한 핑거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3년간 현악부에서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는데, 포지셔닝의 손가락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색, 활털의 재질, 브릿지가 정확한 위치에 놓여 음이 울리는지, 심지어 연주자 팔 길이에 따른 다이나믹 차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다룬 피아노는 물론, 기타는 음색만 들어도 대충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구별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관을 자주 들여다 보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항아리가 왜 모조품인지 지나가는 화면 찰나에도 구별이 가능해졌다. 많은 경험과 감상의 시간들은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선물해줬다.


‘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살피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이라는 단어는 눈의 보는 활동을 넘어 “포괄적으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을 의미하고, ‘살핀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는 적극적 행위를 뜻한다. 즉 심미안을 풀어 이야기하면,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애써 찾으려는 열정적인 눈과 귀와 그 외의 감각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심미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척 어울리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사람들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주했던 성경인물들은 그를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했고, 거룩의 내적 의미는 ‘다르다’라는 사실에 대한 감탄이다. 그분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면 죄로 타락한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구별이 가능해진다(이사야 6장). 구별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다름과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사는 그들의 삶은 세상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영역을 포함하며,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나라 속에서, 그리고 모든 관계와 행위와 선택들이 세상과는 구별된다.


개혁주의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 신학자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의 ‘신학적 미학’의 역사를 애써 외면해 왔다. 아름다움은 감각의 영역이라 신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거두지 않았다.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인류를 대표하는 화가인 반 고흐(Vincent can Gogh)나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반 고흐는 사후 15년 뒤에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열린 회고전(1905)을 시작으로, 바흐는 사후 100년 후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바흐, 1729 초연) 재연(1829)을 계기로, 지금까지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다. 즉,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맥락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며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는 것에 그 복잡함이 있다. 맥락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개인의 믿음과 취향과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어 추적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떤 아름다움은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지, 왜 역사는 특정한 작품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는 익숙하지만, 인간이 만든 예술을 대할 때의 태도와 취향은 극과 극을 오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단어가 가능한 말인지를 늘 의심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형성은 중차대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사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심미안은 순례길에 있어 장식품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것들도 꼼꼼하게 볼 수 있고, 다름과 차이에 그 누구보다 민감해지는 것, 그 길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성화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눈으로 분별하여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섬세한 훈련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꼭 가져야 하는 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큰 강줄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시작은, 순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열망은 세례받은 심미안 시작의 모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잊지 못할 장면들이 있다. 그중 예전 한 미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가운데 트럭에 매달려 목숨을 담보로 레이싱을 즐기던 한 소년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마약 기운에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장면이다. 그 외에도 많다. 평생에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고 온갖 헌신과 봉사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한 여집사님이, 14년간 이어온 불륜 내연남과 호텔에서 심정지로 사망한 참담한 사고의 기억이다. 설교 강단에서 몇십 년을 가르쳤지만 동성애를 지지하고 애완견에게 세례를 주는 목사들이 존재하는 등의 놀라운 경험들이다. 후에 세계관에 관한 공부는 내가 놀랐던 이유를 꽤 명확하게 말해줬다. 


현대사상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섞여 있는 세계관들’이 그 이유다. 성경의 진리 말고도 동양의 범신론적 일원론 사상,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 자연주의 이신론 사상,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등 다른 믿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섬겼던 고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처럼, 한 사람 안에 두 마음 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약 4:8). 이러한 세계관의 공존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정함이 없게 만든다(약 1:8), 그리스도인 속에 숨어서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만큼 분별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선과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죄악의 은밀한 공존은 남도 자신도 특별한 노력의 시선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다.


성경의 진리와 함께 갖가지 다른 세계관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먼저다. 연단의 과정을 거쳐 정금같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를 바란다. 죄가 세련된 멋으로 가장해 가짜 아름다움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유작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개정 6판이 출간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자 쓴 (대학 축제 비판에 관한) 작문 과제물에 대해 F 성적을 받았던 한 학생은, 후에 기독교 세계관의 순전함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사이어와 같이 순전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옥같은 학자들의 책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해 매섭게 파고든 현대사상들을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사상들을 쪼개어 다듬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훈련된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모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기독교 예술학과가 개설되고 학생들을 뽑을 때, 첫 번째 조건은 예술에 대한 학위가 있는 자들이었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하는 문헌들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예술적 심미안’이 어느 정도 길러진 사람을 뽑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하며 마주한 사실은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양의 문헌들이 평생을 괴롭힐 것이라는 슬픈 진실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군분투한 세월에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많이 경험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평생을 미술관을 다니며 얻은 심미안을 엿보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의 글을 외우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대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탐욕의 엔진으로 돌아간다.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한 우물을 팠던 사람들의 경험을 읽어라. 그리고 경험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 선별해서 경험하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은 게걸스럽게 모든 세상 문화 예술 콘텐츠를 즐기고 경험할 시간이 없다. 구별하는 시각을 갖겠다고 매력적인 모든 것을 깊숙이 자세히 경험하고자 하면 너무 많은 죄악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결국 탐욕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다. 


예술 세계의 마지막은 소유다. 소유만이 만족을 주기 때문에 결국 세례받지 않은 심미안의 끝은 원작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며, 라이브로 들어야 만족을 느끼고, 거창한 건축물을 지어내야만 만족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소유의 과정은 심미안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면 덕이 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많은 세계관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사상들은 최대한 간단히 핵심만 보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심미안을 훈련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잊으면 안 된다. 작은 십자가라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마지막 큰 줄기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름다움은 늘 감춰져 있다. 그 숨은 의도를 발견하고 감춰진 내용을 들춰보는 것이 심미안의 묘미다.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든 그 숨겨진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은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자만 획득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댄스, 사진, 영화와 드라마, 시와 소설, 건축 등 수많은 영역의 예술이 존재하고 각자 다 다른 색과 맛의 미학적 노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본질을 파헤치기를 원하는 자, 성경을 열정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와 손을 통해 주신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성경은 쉽지만 어려운 말씀이다. 누구나 명확하게 복음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지만, 알수록 깊어지며 수많은 연구와 묵상의 과정이 필요한 책이다. 


살아 있는 거룩한 언어가 문자로 남겨져 있는 것이 성경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본질을 파헤치는 자만이 그 안의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 빛과 색과 소리와 움직임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로 모두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데, 실로 생명의 아름다움은 실존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일차로 하나님으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많은 버전의 성경을 읽어보고, 충분히 묵상하며, 쉬운 주석부터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기를 기도하라. 심미안을 가장 온전하게 형성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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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나영

서나영 박사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파트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